가을이 무르익어 가면 필자는 양재천 남쪽 언덕옆을 따라 작은 숲이 있는 길을 걸어 본다.
이곳은 강남에서도 알아주는 낙엽길이다.
낙엽이 흐드러지게 깔려 있는 숲길을 걷다보면 문득 50년 전 어릴 때의 우리 집 연탄공장이 생각난다.

당시는 한국전쟁 후 겨우 10년이 되어가는 때로 일거리도 없고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당시 유일한 연탄공장이었다.
아버지가 강원도 태백 장성탄광에서 연탄을 4톤 트럭 한차에 밤새 쉬지 않고 싣고 와서
수동식연탄제조기로 밤낮으로 19구공탄과 가끔 대형연탄을 만들어 동네에 파셨다.
딱히 직원들을 데릴 수 없어 온 가족이 공장 일에 매달렸다.
큰아버지, 외삼촌, 작은 아버지 처남 등 우리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그나마 그분들에게는 소중한 일자리였다.

연탄배달은 낮에는 일꾼들이 했지만 새벽이나 저녁 늦은 때는 어린 필자(초등학교 6학년~중학교2학년)도 연탄배달 일을 하였다.
가끔 역전을 향해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연탄은 대개 30장이나 60장씩 배달하였지만 언덕길은 매우 어렵다.
잘못하여 손잡이가 리어카 뒤로 쏠린 연탄들의 하중에 못 이겨 내 머리 위까지 치솟기도 하고 눈이나 비라도 오면 미끄러워 언덕길 배달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연탄을 다 뿌리고 돌아올때는 언덕길을 신나게 달려 내려오는 맛을 즐길 수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리어카 운전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거의 프로급 수준으로 리어카를 다루었던 것 같다.
요즈음 길거리에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들을 가끔 보는데 대개 폐지나 고물상수집이 대부분이고 좀 젊은 사람들은 과일이나 노점상차림으로 끌고 다닌다.
어린 아이들이 리어카를 끄는 것은 최근에는 본 적이 없다.

내 어릴 때 동네사람들이 나를 "연탄공장아들"이라 불렀다.
내 얼굴은 연탄으로 검게 색칠해 있었고 나는 이집저집 부엌을 드나들면서 한번에 2장이나 4장씩 수도 없이 배달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공부도 1~2등 했고 반장이나 학생회장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배달 간 곳이 하필이면 내가 평소 관심(?)을 가졌던 예쁘기로 손문난  H여학생 집이었다.
혹시나 그 학생이 나를 알아볼까 바 얼마나 걱정했는지...나는 언제 연탄을 다 날랐는지도 모르게 부리나케 그 집을 뛰쳐 나왔다.

우리 공장에서는 한켠에서 국화빵도 만들고 일본 “게다(나무신)”도 만들어 팔았다.
나는 풀빵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어 시간만 나면 열심히 구경하면서 그 주위를 맴돌았다.
풀빵 만들다 만드는 분이 화장실이라도 가면 나는 번개처럼 그 자리를 꿰차고 평소 기억했던 국화빵제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풀어놓은 외상이 걷히지 않고 연탄구입에는 현찰이 들어가다보니 결국 우리는 못받은 빚만 수천만원(지금으로 치면 수억원도 더 된다) 장부에 기록할 뿐 대책이 없어 망하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에게 좋은 일(?)만 하고 우리 가족들은 수년간 고생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 사업실패로 아버지는 외국으로 가시고 그때부터 경제사정은 좋아졌지만 우리 가족은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연탄을 보면 어릴 때 연탄배달하던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연탄은 사실 매우 효과적인 에너지원이다. 우선 비용이 적게 들고 19공탄 같으면 거의 하루밤을 견디어 낸다.
단 가끔 원치 않은 연탄가스사고를 일으키기도 하지만....이 일산화탄소중독은 지금도 심심찮게 뉴스꺼리로 나온다.
당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원치 않은 사고 였던 것이 지금은 삶에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마지막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옛날처럼 사고가 적고 대개 사고를 뒤늦게 발견하므로 고압산소치료가 옛날 만큼은 자주 있지는 않다.
일찍만 발견하면 30분의 탱크 속 치료로도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강남을 다니다 보면 가끔 연탄구이나 연탄갈비를 하는 가게를 본다.
연탄은 자주 갈아주지를 않아도 되므로 손길의 수고를 줄여주어 서민들이 많이 찾는 선술집 같은 곳에 지금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오늘도 양재천을 가로 지르는 영동교를 지나면서 폐지를 잔뜩 담은 리어카 한 대를 만났다.
손잡이를 밀기도 하고 가슴으로 당기기도 하는 노인을 옆으로 지나면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공을 달리 하지만 어릴 때 내가 저 손잡이에 몸을 맡긴채 힘든 연탄배달을 하였는데....
내 어릴때 모습이 지금도 왠지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이렇게 2014년 가을도 조금씩 영글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