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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11:10:54)
수정일
2022-04-16 (19: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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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추억들...
내 기억에 대구는 정말 덥고 추운 도시였다.
나는 1973년부터 79년까지 7년간을 대구에서 보냈다.
순전히 의사가 되기 위해 생전에 한번도 가본 적 없었던 대구에 갔다.
나는 고교시절 졸업을 몇개월 남겨두고 심한 병으로 휴학에다 대학포기 상태였다.
그런데 2년여간 투병 끝에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여,
원래 희망했던 서울대 공대 대신 의과대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 의과대학이 바로 대구의 K의과대학이었다.

의대에 합격했던 73년도는 나에게 최악의 해였다.
수중에 단돈 몇푼을 들고 홀홀단신으로 대구에 의사가 되기 위해 입성하였다.
다행히 아는 곳이 있어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처음 한 두해는 무사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있었지만,
가정교사 일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정들었던 박법무사댁을 박차고 나와 제대로 된 고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이집 어른신들이 고아와 같았던 나를 잘 보살펴 주었던 것 같고,
당시 내가 가르쳤던 박H.G.와 박J.G.이가 지금에야 보고 싶기도 하고 끝까지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다.

의과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최악의 연속 이었다.
하루이틀 굶는 것은 다반사 였고, 의학서적도 변변찮았고 의식주는 밑바닥 이었다.
어떻게 그 힘든 의대생활을 마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운동(학교내 배구 선수 였다)도 열심히 하고 종교활동도 틈틈히 이어 나갔다.
천주교신자인 나는 대구의 삼덕성당을 다녔고 의대내에서는 가톨릭회장으로 활동했다.
독서도 부지런히 했고 심지어는 야학도 했다.

그러나 워낙 나의 환경이 나빠 여러면에서 불량한 모습도 연출했고 이로인해 나에 대한 나쁜 소문도 있었던 걸로 안다.
한치 앞을 분간 못할 어려운 여건에 처했던 20대 초반의 고학생이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니며 저지른
이런저런 단정치 못한 나의 흑역사에 대해 나는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련다.
지금 이 나이에도 그때의 혈기를 반성하며 하루하루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정환경이 불우한 중학생들을 돌보기도 했다.
청옥이라는 고등공민학교에서 야학을 했다.
한때 전태일이 다녀서 알려진 바로 그 청옥고등공민학교의 영어선생으로 몇년간을 봉사했다.
원래 경북대 사범대생들이 주축이 되어 청옥을 이끌었는데 친구의 안면으로 나도 같이 했다.
여기서 미술을 가르쳤던 예쁘고 참으로 귀여운 여선생을 알게 되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지금의 나의 아내 오여사이다.
어쩌면 그 여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져 청옥에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구의 효성여대 미술과에 다녔던 그 여학생을 만나려고 나는 수없이 효성여대를 찾기도 했고,
같이 등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갈피에 꽂힌 나뭇잎에 취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첫사랑의 기억들이다.
힘든 고학의 와중에도 나는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기도 했다.
형편이 되면 음악감상실도 가끔 찾았었는데 당시 대구에는 하이마트와 녹향이 유명하였다.
이들 음악실이 대개 동성로에 있었는데 당시 대구는 동성로,북성로,등 성을 중심으로 도로를 명명하였다.
영화는 한일극장에서 가끔 봤고 그때 ABBA들의 실황공연은 무려 2번인가 3번을 볼 정도로 감명깊게 보았다.
처가집의 고향이라던 달성공원도 가끔 휴식차 들렀는데 달성서씨들의 집성촌으로 훗날 국가에 헌납하였단다.

내가 대구에 있었던 그 당시  대구는 참으로 덥고 추웠다고 기억한다
한여름에 시멘트 슬라브집에 살았는데 너무 더워,
저녁이면 피서겸 쉴겸 당시 대구에서 제일 시원한 대구백화점을 찾기도 했다.

힘든 고학생활이었지만 나는 나의 처지에 조금도 굴하거나 위축되는 법이 없었다.
운동도 하고 종교활동 그리고 연애도 했으니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던 외지 학생이었다.
원래 의대 입학때 거의 수석이나 같은 우수한 성적이었고 게속 장학생이었으니 교만할 수도 있었다.
결국 집사람과 연애에 몰두하고 공부를 잠깐 등한시 했던 나는 의대1학년때 그만 0.1점인가 하는 점수로 과락했다.
내 인생에 처음 맛보는 실패의 쓴 맛이었다.
나는 지금껏 무슨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2둥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1류 의대도 아닌 대구라는 지방에서 낙제를 하다니 그후 나는 나락으로 빠지고 말았다.
주위의 눈초리도 냉랭하기 그지없고 돈 없고 빽 없던 나는 자칫 의사되기를 포기할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7전8기의 투철한 도전정신으로 다시 공부에 매진하여 결국 좋은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1979년 드디어 서울 백병원에 거의 1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집사람은 이때 마지막 2년을 거의 공부 뒷바라지에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헌신적으로 나를 돌봐주었던 내 아내의 갸륵하고 여자의 몸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던 모습들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아마 내가 의사가 되라고 하느님이 내 아내를 나에게 보내었는 지도 모른다도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항상 내 아내를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

대구는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여러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의사로서의 내 인생의 기초와 근거를 마련했던 곳이고,
나의 그때의 수많은 잘못과 불찰도 용서하고 받아주었던 고마운 분들,동기들이 있었던 곳이니...
나는  한없이 그들이 고맙고 미안하다는 마음을 내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간직하련다.
단지 다시 대구로 가서 그때,그 당시의 나를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줄 수 없음을 안타까와 할 뿐이다.

대구는 어쩌면  나의 제2고향이요 나의 마음의 안식처요 내 꿈의 틀을 짰던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전혀 생소했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었던 그 곳에서,
무사히 한사람의 의젓한 의사가 되도록 기회를 주었던,
그 대구를 나는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의사생활 마지막까지 대구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기억을 되새기며,
훌륭한 의사로 남아있도록 최선을 다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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