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할 만큼
빈번하게 사고가 발생한다. 필자는 유난히 교통환자가 많은 병원의 외과과장직을
수행한 적이 있다. 저녁 6시경 퇴근해서 집에 오면 쉴 틈도 없이 요란하게
삐삐 (그당시에는 호출용으로 쓰였음)가 울려, 밤잠을 설치기가 일수였다.

그날도 밤에 호출이 왔고 부랴부랴 차를 몰고 와보니 환자는 겨우 의식이 있었고
혈압도 약하게 뛰고 있었다. 진찰해보니 복부출혈이었다. 안양 인덕사거리에서
술에 취해 택시를 잡다가 달려오는 차에 정면으로 복부를 강타당한 것이었다.
바로 수술실로 직행했고, 좌우팔에 링거액과 피를 달고 보호자의 간단한 수술승락서를
받고는 수술에 들어갔다. 뱃속은 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간이 파열되었고 이어서
비장파열, 그리고 또 폐가 찢어진, 그야말로 다발성손상(multiple trauma)환자였다.
찢어진 간을 잘라내고(부분적으로) 비장은 적출하였다. 물론 피는 쉴새없이 주입해야 했다.
그날 이 환자 수술에 들어간 피의 양은 무려 26파인트(1pint가 약 350cc,였으니
무려 9000cc의 피로 정상인의 총 혈액양의 약 2배에 가까움)였다. 엠뷸런스 기사는
혈액원을 몇번 다녀와야 하는 고생을 하였단다. 그러나 정작 가장 힘든 것은 집도의다.
물론 환자와 가족들의 고생과 걱정근심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필자는 저녁 9시경에
수술실에 들어가서 다음날 오후 2시가 되어서 수술실을 나올 수 있었다.

이를테면 모든 외과수술들이 그날 그 환자의 뱃속과 가슴속에서 이뤄졌다고 보면 맞다.
이렇게 17시간에 걸친 수술을 하고 나면 집도한 의사는 탈진하고 만다. 체중이 3~4kg이 준다.
온몸은 비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다.

교통사고 수술과 같이 수술전에 전혀 수술과정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는 일단 배를
열어봐야만 무슨 수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마치 망망대해를 chart(해도)도
없이 무작정 항해하는 선장과도 같다. 앞에 무엇이 닥칠지 예측불가능하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집도의의
경험과 노련함, 그리고 신속한 판단과 결단이 필수적이다. 외과의사는 그래서 사자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호랑이와 같은 눈과 용맹성, 그리고 여우와 같은 간교할 만큼의 손재주를
가져야 한다. 강한 의지,환자를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자신감과 의무감, 희생정신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체력은 필수적이고,순간순간 재치있게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들 중 그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있으면 최고의 외과의가 되기는 어렵다. 수술 중에는
마치 전쟁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간호사(scrub nurse)에게 빨리빨리를 수없이 외치고
마취과의사에게는 맥박과 혈압을 거의 10분간격으로 불러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피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피가 없으면 탄환없이 전쟁터에 가는 군인과 같다.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다. 만약 환자가 O형이라도 되면 피 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
"피(blood),피"하는 집도의 숨가쁜 닥달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수술한 환자가 생존하였다.
중환자실을 나와, 수술후 10일째 드디어 복도에서 환자와 나는 마주쳤다.
환자는 "점심 드셨는가?"고 물어본다......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 외과의는 사생결단을
하고 수술에 목숨을 건다. 수술로 지쳐 쓰러지는 외과의도 많다. 환자 한명을 살리면
외과의 수명이 1개월은 단축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다. 내 목숨을 환자의 생명에다
부어주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게 수술을 한 뒤 환자가 다시 건강을 찾았을 때
조그만 보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런 힘든 수술을 지원하는 외과의가 씨가 말랐단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고 있다.
힘든데 비해 위험에 너무 많이(격무, 직업병빈발, 적은 월급, 잦은 의료사고로 환자와 마찰이 빈번함..)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멀지않아 우리나라에서 외과의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아마 외국에서 수입해야 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그 어느때 보다 힘들게 진료하는 외과의사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할 때인것 같다. 결국 환자들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