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fiction 입니다.

1991년도로 기억한다. 그때가 개업초년생으로 막 사회에
진출했던 시기다. 필자는 지금까지 네번에 걸쳐 병원을
옮겼는데, 처음으로 개업을 한 곳은 서울의 변두리였다.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살던 서울의 외곽지역에서 아주 힘들게
진료했는데, 위치도 위치거니와 건물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주위에서는 개업이 성공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많이들 걱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첫 개업지에서 약 3년여를 열심히 근무하여 나름대로
앞으로의 보다 나은 개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고 믿는다.
그 곳에서의 일화다.

하루는 그 지역의 소위 지역유지 한 분이 찾아왔다.
내가 간(肝)을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했는데,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의 얼굴은 약간 검게 황달에 걸려있었고 배는
복수로 부어있었다. 얼핏 봐도 간질환(肝疾患)의 말기상태였다.
사실 이 환자는 6개월 전에도 내가 진료를 한적이 있었던 환자였다.
간이 안 좋으니 간초음파와 혈청검사 같은 간검사를 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었던 바로 그 환자였다. 그 당시 그 환자는 이런저런
핑계로 검사를 받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놀랍게도 첫 진료 때
약간의 비용이 드는 검사를 마다한 이유는 바로 검사비용 때문이었다.
10 여만원의 진료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 검사거부의 이유였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서 다시 나를 찾은 환자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사실 너무 늦게 병원을 찾아 온 것이었다.
우리병원을 다시 찾기 전에 딴 병원에 가서 간암의 진단, 그것도
말기간암의 진단을 받은 터였다. 환자가 하는 말은, "김선생, 나 살려줘.
내병만 고친다면 내 재산 절반이라도 드릴께.돈은 얼마든지...내 목숨만
살려주시게" 라는 것이었다.

그 환자는 원래 평범한 농사꾼으로 그 지역 토착민이었는데, 자기
소유의 땅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벼락부자가 된 경우였다.
당시 재산으로 수백억이 넘는다는 소문이었으니 굉장한 땅부자 였던 셈이다.
그러나 돈에 관해서는 한푼 쓰는 것도 벌벌 떠는 깍쟁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성간염을 앓던 환자에게 주기적으로 초음파와 간염,
간기능검사를 할 것을 재촉했던 나의 단순한 의사로서의 지시도
돈이 아까워 주저했던 것이 그만 초기간암을 놓친 것이었다.
간암은 6개월을 방치하면 사실 치료를 포기한거나 다름없는
바보스런 행동이다. 뒤늦게 나를 찾아와 애타게 부탁하는 그 환자의
때 늦은 하소연이 지금도 가끔 나의 뇌리를 스친다.
그 환자는 그런 뒤 2주일이 채 안되어 이 세상을 하직하였단다.
그 많은 돈을 한 푼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것은 그렇다 치고, 간단한
간초음파도 제때 해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나는 가끔 이 환자를 생각해 본다. 모든 병은 때를 놓치면 쉽게
치료할 병을 키워 불치병으로 만들 수 있다. 돈이 아까워,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하다가 증상이 완연해서 찾아 오면 때는 늦게된다.
그래서 의사인 나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환자에겐 검사받도록 설득하기를 주저 않는다.
환자들은 자칫 나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객관적인 자세에서 의사말을 듣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설령 의사말이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결국 자신을
위한 권유이므로 두번 세번 권하는 의사의 검사권유를 매번
"no,no,next..." 하다가 운이 나쁘면 그게 자기 생명에게 그대로
하는 말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병의 조기진단(早期診斷)에 관해서는 장사(壯士)가 없다고 한다.
백명의 명의(名醫)보다 조기검사가 더 명의란 것을, 우연히 해 본
검사로 초기위암을 발견하여 지금도 건강하게 진료하고 계시는
내가 아는 의사분을 예로 증명해보이면서 오래 전 참 바보스럽게
돌아간 갑부환자이야기를 올려본다.
"김선생,내 병을 치료해주면, 내 재산의..", 딱했던 그 환자의 이야기는
늘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그런 아차 간과하기 쉬운 일임에는 틀림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