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여 첫 담임선생 역시 여선생님 이었고
나는 아직도 이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수업 첫날, 나를 불러 세워, 급장을 시킨 것이었다.
국어를 가르쳤던 선생은 같은 안동출신으로 다정다감하였고
매우 변덕스럽기도 했으나 유독 나에게만은 항상 미소와
친절을 잃지 않으셨다. 객지였던 선생님께 일요일이면
어머니가 준비한 김치나 어떨 땐 통통한 닭도 갖다 드렸다.

중학교 때는 우리집은 온갖 짐승들로 붐볐다. 토끼들을 여러마리
길렀고 그 중에는 회색의 친칠라, 갈색의 벨지언, 흰털의 앙고라,
빨간눈의 일본토끼들로 토끼장은 늘 요란스러웠다.
그런데 밤새 토끼장이 시끄러웠던 날은 영락없이 족제비가 토끼를
잡아간 날이다. 닭도 길렀는데, 새벽이면 어김없이 장닭이 꼬끼요를
외치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닭장에 가서 달걀을 꺼내왔다.
계란프라이에 쓰기 위해서다. 염소도 길렀다. 흑염소인데, 학교수업이
파하면 뒷산에 끌고가 한두시간 풀을 뜯게 하는 일이 중요한 나의 일과였다.
또, 당시 집에는 개들도 있었고 고양이도 길렀다. 이를테면 동물농장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동물들과 무척 친숙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장독 옆에는 떨감나무가 있어 봄철에는 감꽃을 줏어먹고,
여름철에는 태풍에 떨어진 덜 익은 떨감을 소금물에 담가 탄닌을 숨죽여
먹었고, 가을철에는 익은 감을 매미채로 따서 먹었다.
겨울철에는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마치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구름사이에 몇개 달랑거리며 붙어있는 감을 보면 한편의 시와 같기도 했다.
집 한쪽에는 무화과나무가 여럿 있었는데 가을에 잘 익은 무화과를
따먹는 재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 뒷문이 우리집 쪽으로 열린
옆집아저씨의 손버릇과 나무를 잘 타는 쥐들만 조심하면 자주빛 나는
달디단 무화과는 나에게는 늘 준비한 가을의 진수성찬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중학교에서 나는 후배들에게 "전설"로 통한다고 들었다. 사실 나는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거의 수석을 하였으며, 교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했으며, 배구선수였고, 그림도 곧잘 그렸다. 모든 분야에서 특출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계신다.
그런데 교내에서가 아니라 학원원장이다. J 원장은 M 학원을 운영했는데,
영어를 가르쳤고 당시 시골의 난다긴다하는 인물들은 다 이 학원에 모였다.
학교에서 일등부터 10등까지 이 학원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자그마한 키에 짧은 발음인데 늘 서글서글하며 자신감에 찬, 쉬운 영어를
재미있고 집중력있게 가르쳤다. 나의 영어실력은 전적으로 이분 탓이다.
뛰어난 선생 한 사람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 가를 이분에게서 배웠다.
참으로 탁월한 선생님이셨다. 그 아우도 유명한 대법관(J대법관)으로
노전대통령의 탄핵사건을 다루었던 법관으로 잘 알려졌었다.
훗날 J 원장은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나는 중학교 때, 집안 일이 많았다. 동물 키우는 것 말고,공장일을
늘 도왔다. 심지어는 직원이 없으면 내가 배달꾼을 대신했다.
한번은 내가 초등학교 때 매우 좋아했던 여학생집에 배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혹시나 마주칠 까 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언젠가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이런 열악한 상태에서
공부했는지, 그것도 전교수석을 했는지 신기해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공장 안에는 풀빵을 만들어 팔았는데, 빵장수가 자리를 비우면
잽싸게 자리를 꿰차고 내가 직접 풀빵을 만들었는데 무척 잘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번 본 것은 꼭 집에 와서 똑같이 따라해 보았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학생회장을 한 나에게 덩치 큰 학생들의 도전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숨어서 태권도를 매일 연습했고 아마1~2단의 실력은
갖추었던 것 같다. 싸움을 걸어오면 나는 한번도 피한 적이 없었다.
학교 뒷산에서 만나 결투를 벌렸는데, 나의 날렵한 옆차기와 이단옆차기를
한번 보여주면 대개는 꼬리를 내렸다. 오히려 친구들이 나를 두려워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우리집에서 학교까지 늘 뛰어갔다. 무거운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매일 콩나물 버스와 경쟁을 벌였다. 그런 달리기 습관 덕택에 교내 체육대회의
장거리 달리기에서 대표선수들을 다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했는데 당시에
한참동안 이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공부만 잘하는줄 알았는데
아마추어에 불과한 범생인 내가 단거리마라톤에서도 내노라하는 육상선수들을
다 물리치고 일등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1968년에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의 경남고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이제 나의 본격적인 학창시절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