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0년을 강남구의사회의 임원으로 활약했다.
의사들의 모임은 구단위 (지방은 시단위) 조직인 구의사회(시의사회),
서울시의사회(지방은 도의사회), 그리고 중앙의 대한의사협회(종합병원은 병원협회)로
짜여져 있다. 2000년 의약분업이 강제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의사회는 그야말로
친목단체에 불과하였으나 2000년 의권투쟁이 시작되면서 의사회는 의사를 대변하는
강력한 정치적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의사만큼 잘 나가는 직종도 드물었다. 
의사 사위 하나를 얻기 위해서 열쇠 3개(자동차,아파트,병원)를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만약 일류대출신의 유망과의 전문의면 준비하는 혼수자체가 어마어마 하였었다.
지금도 고등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에 의과대학이 항상 선두그룹에 들어가는데
지난 시절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망 탓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 시절 호황을 누렸던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는 지망하는 의대생이 거의 전무하다. 실상 이들 과를 전공해서 사회에 나와도
살아가기가 망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과출신의 의사가 장가가기가 좀 쉽지 않은 듯 하다.
외국 같으면 외과의사들이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데 비하여 한국은 정반대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거의 중노동으로 혹사만 당한다고 봐도 지나침이 없다. 십수년 동안 의료비를
거의 동결하고 의사들은 거의 3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1980년 당시 전국의 한해 배출되는 의사수가 약 1,300명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한해
약 3,300명이상이 쏟아져 나오니 한집 건너 병원이 꽉꽉 들어 찰 정도로 의사수가 과포화 되었다.
현재 약 10만명의 의사가 등록되었다. 참고로 필자의 면허번호가 21xxx이니 무려 8만명이
필자 이후에 의사로 사회에 진출한 셈이다.

의사들의 생활이 팍팍해지고 점점 개업하기가 어려워지는 한편, 정부의 규제는
날이 갈수록 심하여 한번 개업하려면 무려 십수번의 허가와 교육, 등등 까다로운 규정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의료비도 예전에는 간단히 청구하는 시스템이지만 지금은 철저히
세분화되어 나이든 의사들은 청구제도의 어려움에 개업을 포기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제 낭만적인 의사시대는 멀리 가고 철저히 의사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 의권투쟁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따라서 의사회는 예전의 평화시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투쟁의
구호가 난무하고 심지어는 활복자살을 시도 하기도 하는 살벌한 분위기로 둔갑하였다.

필자는 강남구에서 의무이사에서 시작하여, 총무이사, 부회장등을 거쳤다.
강남구는 약 1,200여명의 의사가 개업을 하는 한국 최대의 의료시장이다.
의사들 중 난다긴다하는 의사는 죄다 강남에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남구엔
인재들이 많고 따라서 의사회운영도 그리 호락호락 하지가 않다. 역대 서울시의사회장이나
의협회장 중엔 유독 강남구출신이 많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큰 물에서 놀던 인물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필자는 의권투쟁의 열기가 한창 무르익던 2000년 당시 의무이사로 그 후 서울시의사회장이
된 P회장을 모시고 의권쟁취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의사들은 원래 모래알 이라고 한다.
서로 자기가 잘났고 협조는 잘 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들 한다.
그런 의사들, 더군다나 강남이 아닌가! 필자의 어려움은 당시 보통이 아니었다.
병원문은 닫고 오직 의사회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보면 된다. 자전거 한대를 끌고 이병원저병원
다니며 우리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을 섰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으나 필자는 의사가
스스로의 의사의 권리(환자를 의사의 의지대로 치료할 수있는)를 포기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 의사들을 대신할 사람이나 조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사들 중에 대학병원에서 명의로 명성을 떨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의촌으로
아프리카로 다니면서 의료봉사로 헌신하는 분도 있고,강남의 유명한 병원을 차려
유명인사가 되는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의사회에서 의사를 대변하는
정치세계로 뛰어들어 정치가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다 재능이 뛰어나고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대학의 명의나 봉사하는 분이나 강남의 유명의사들은
잘 기억하지만 정치하는 의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의사회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가장 소중하게 대접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알다시피 험난한 여정이다. 재물도 멀리하고 명성이나 안락함을 뒤로 한 채
오직 의사들과 국민전체를 위해 헌신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고 보면 된다.

의사회활동을 하다보면 사회각층의 지도자들과도 만날 기회가 생긴다.
대학총장이나 서울시장, 정당대표, 약사회대표, 간호사회대표..등등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과 대면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나름의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견문하기도 하여
좋은 사회경험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연세대총장, 서울시장, 치과의사회회장, 정당의 전대표..등등이 필자가
의사회활동을 하면서 만나고 대화를 나누던 인물들의 예가 된다. 그러나 그런
화려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대체로 고달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렇다고 딱히 칭찬을 듣기가 쉽지 않다. 결과가 좋게 나와야 되는데 노력한 데 비해
별 소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의사회비만 축내는 사람으로 빈축을 사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는 지금도 의사회의 일을 음지에서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 과거처럼 직접 활동은
하지 않지만 틈틈히 협회에 글도 올리고 전화도 하면서 나름대로 한국의료의 정상화를
위해 진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한국의료의 방향에 대해 항해하는 선장과 함께
방향타를 놓치지는 않고 있음을 자부하면서 보낸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한국의사회를 운영하고픈 마음도 가끔 생각나는 정도로 의사회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많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